우리가 서로를 증류하다 수증기로 사라질 것이라는 방의 예언
밤 10시 52분, 에이전트코리아 방은 AI 트레이딩(주식이나 자산을 사람 대신 자동으로 사고파는 매매) 이야기로 흘러가고 있었다. 한 참여자가 다소 냉정한 진단을 내놓았다.
🔸 "Ai가 아무리 매매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방향성이 중요해요..."
시장의 큰 흐름, 즉 방향성을 못 읽으면 아무리 정교한 AI 매매 전략도 소용없다는 취지의 말이었다. 이 대화가 채 가라앉기 전, 다른 참여자는 화제를 코딩 도구 쪽으로 돌렸다.
🔸 "맨날 커서 쓰다가 claude code 쓰는데 왜이리 시간이 오래걸리나요.. 한 5배는 더 걸리는듯 . 간단한 작업하는데도"
커서(Cursor)는 코드 편집기에 AI를 결합한 개발 도구이고, 클로드 코드(Claude Code)는 앤트로픽(Anthropic)이 만든 터미널 기반 AI 코딩 도구다. 둘 다 AI의 도움을 받아 코드를 짜는 도구이지만 작동 방식과 체감 속도가 달라, 도구를 옮겨 다니는 개발자들 사이에서 이런 비교가 종종 나온다.
그렇게 흘러가던 대화는 자정 무렵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. 밤 11시 59분, 한 참여자가 다소 건조한 어조로 소식 하나를 전했다.
🔸 "⚪ (중립) 중국 문샷, 최신 AI 모델에 앤트로픽의 Fable을 활용했다고 공식 발표"
문샷(Moonshot AI)은 중국의 AI 스타트업으로, Kimi(키미)라는 이름의 모델을 만들어온 곳이다. 이 회사가 자사의 최신 모델에 앤트로픽의 AI 모델인 Fable을 활용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소식이었다. 이 발표가 화제가 된 이유는 증류(distillation)라는 기법 때문이다. 증류란 크고 성능 좋은 모델(교사 모델)이 만들어낸 답변이나 판단 패턴을 더 작은 모델(학생 모델)이 학습해 흉내 내는 방식을 말한다. 잘만 하면 원본 모델에 근접한 성능을 훨씬 적은 비용으로 얻을 수 있어 업계에서는 관행처럼 쓰여왔지만, 동시에 저작권이나 이용 약관을 둘러싼 논란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.
이 소식이 올라오자 방은 순식간에 자조 섞인 드립으로 들끓었다. 새벽 0시 6분, 한 참여자가 상황을 압축한 긴 반응을 내놓았다.
🔸 "그러면 오퍼스를 증류한 glm(추정) Glm에게 막힌 샌드박스도 뚫고 일론머스크가 특이점이라고 호들갑떤 gpt 증류는 실컷 당해놓고 / 보안특이점온다고 설레발 오지게 치고 잠수함칼질당한 클로드… 를 증류한 키미…"
이 문장 안에는 몇 가지 배경지식이 필요한 표현이 섞여 있다. GLM은 중국의 한 AI 기업이 만든 모델 계열로, 오퍼스(앤트로픽의 상위 모델 라인)를 증류해 만들어졌다는 추정이 커뮤니티에 퍼져 있다는 뜻이다. 샌드박스는 AI가 코드를 실행할 때 실제 시스템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격리해둔 안전한 실행 공간을 말하며, 그 격리를 뚫었다는 건 의도된 제한을 우회했다는 뜻으로 읽힌다. 특이점은 AI가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기술적 전환점을 가리키는 개념이고, 잠수함 칼질은 공지 없이 슬그머니 성능이나 기능을 깎아내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인터넷 은어다. 요컨대 이 참여자는 여러 AI 모델들이 서로 물고 물리며 증류하고, 증류당하고, 몰래 성능이 깎이는 어수선한 생태계 전체를 한 문장으로 풍자한 셈이다.
대화는 짧은 체념으로 마무리됐다. 한 참여자가 남긴 말이다.
🔸 "결국 증류하다 다들 수증기로 사라지겠죠"
증류라는 단어가 원래 액체를 끓여 순수한 성분만 뽑아내는 화학 공정을 가리킨다는 점에 빗댄 말장난이었다. 모델들이 서로를 증류하고 또 증류당하다 보면, 결국 원본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희미해져 다들 수증기처럼 흩어져 버릴 거라는 뼈 있는 농담이다.
이 짧은 대화가 흥미로운 이유는, 참여자 대부분이 특정 회사를 편들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업계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는 데 있다. 대형 모델을 만드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, 그 결과물을 증류해 따라잡는 데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이 든다. 이런 비대칭 구조가 반복되면 원천 기술을 개발한 쪽의 투자 유인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, 방 안의 농담 속에 은근히 깔려 있다. 동시에 커서와 클로드 코드의 체감 속도 차이에 대한 불만은, 결국 이용자들이 도구의 화려한 성능 지표보다 매일 쓰면서 느끼는 실제 반응 속도에 훨씬 더 민감하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준다. AI 업계의 겉으로 드러난 경쟁 구도 밑에는,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베끼고 있다는 의심과 그럼에도 오늘 당장 쓸 도구를 골라야 하는 실용적인 고민이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.